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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_ 김동명(金東鳴, 1900-1968)

어르신1 2015. 5. 10. 07:58

 

 










어 머 니

                       김동명(1900-1968)


타박타박 타박녀야!
너 어디로 울며 가늬?

내 나이 어렸을 제,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혹은 '코쿨' 앞에 마주 앉아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말하면, 달 속의 계수나무와 옥토끼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은하수 가의 견우 직녀 이야기, 천태산(天台山) 마구[麻姑] 할멈 이야기, 구미호 이야기, 장사 이야기, 신선 이야기, 그리고 '유충렬전(劉忠烈傳)', '조웅전(趙雄傳)', '장화 홍련전', '심청전' 등 고담책(古談冊) 이야기며, 이 밖에도 이루 들 수 없도록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마는, 그 가운데서도 슬프기로는 타박녀의 이야기가 으뜸이었다.

영영 가 버린 어머니를 찾아,
슬피 울며 타박타박 걸어가는 타박녀!

어디선가, 타박녀의 흐느끼는 울음소리 귓가에 들리는 듯하면, 타박타박 걸어가는 타박녀의 뒷모습이 눈앞에 서언하여, 나는 이 슬픈 환상 때문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아, 타박녀의 울음소리,
타박녀의 뒷모습!

이것은 바로 내 눈물의 옛 고향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도 어느 사이에 어머니를 잃은 '타박녀'가 되었구나. 더욱이 나는 어머니와 함께 눈물도 동심도 다 잃어버린, 세상에도 가엾은 고아가 되고 말았구나!
내 나이 어렸을 제, 우리들이 타관에 나와 단칸방 셋방살이로 돌아다니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어떤 날 나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내가 이다암에 커서 무엇이 되기를 바라나?"(나는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반말을 썼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다소의 과대망상증을 가진 나는 자못 자신만만하다는 듯이, 어머니의 소원을 물었다. 순간 어머니의 눈은 빛나셨다. 내 신념에 움직이신 듯――그리고 은근하신 어조로, "강릉 군수가 되어 주렴."
이것은 어머니의 향수. 고향으로 돌아가시고 싶은 간절한 심정이리라. 그러나 비단옷이 아니고는 돌아가시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슬픈 결심이기도 하다.
아아, 어머니는 드디어 고향길을 못 밟으시고 저 세상으로 돌아가신 지 오래니, 내 이제 강릉 군수를 한들 무엇하리.

언젠가, 어머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쓸쓸히 웃으시며, "암만해도 너는 좀 못생겼어."
이것은 내 어머니의 무서운 야심이신가. 또한, 그 냉엄하신 비평 정신의 편린이시기도 하리라.
나는 수염을 깎고 새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설 때면, 가끔 어머니의 말씀을 회상하고 고미소(苦微笑)를 흘리는 버릇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언젠가, 어머니는 방학 때에 돌아온 나를 보시고,
"너도 인젠 편지는 제법이더라. 말이 좀 까탈스러워 흠이지마는――그러나 아직도 병두(炳斗)만은 못해." (병두는 나보다 연장인 내 조카로, 문장에 다소 능하다.)
겨우 국문을 해독하시는 정도의 어머니로, 이 얼마나 '건방지신' 말씀이시뇨? 저 놀라운 긍지와 자부심의 한 끝은 여기에서도 엿보이는 듯――.

예수를 믿어 석 달 만이면, 전도(傳道) 부인이 될 수 있으리라던 어머니. 내게도 고질처럼 따라다니는, 대언 장담(大言壯談)을 즐기는 버릇이 있으니, 이것도 필경은 어머니께로부터 받은 슬픈 유산의 하나인가!



김동명(金東鳴, 호 超虛, 강원 강릉 출생) : 시인. 정치평론가. 시집 <파초>, <진주만(眞珠灣)>, <목격자(目擊者)> 등이 있으며, 대표시로 교과서에 실린 "파초(芭蕉)"와 가곡의 노랫말로 널리 알려진 "내 마음은" 등을 들 수 있다. 함흥 영생고보 나온 후 여러 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항일운동 연루로 추방을 거듭 당했다.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靑山學院)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보들레르에게 바치는 시 <당신이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으로 문단에 데뷔하였고, 시집 "파초" 등으로 일제에 항거하고 창시개명을 거부한 민족시인의 면모를 보였다. 해방 후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정치평론을 쓰기 시작했고 1960년에는 초대 참의원에 당선되어 현실정치에 참여하였다. 정치평론집 <적과 동지>, <역사의 배후에서> 등을 펴냈다. 북한 체제를 비판한 시집 <삼팔선>과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고발한 시집 <진주만> 등으로 아세아자유문학상을 받았다. 고향인 강릉시 사천면에 2012년 생가복원과 함께 "김동명문학관" 및 "김동명詩碑공원"이 건립되었다.



내 마음은(김동명 시/김동진 곡) _ 노래 김인혜


《ess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