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 나무를 만나야 하는 이유 ‡‡
남 효 창 - 자연변호사(Naturelawyer), (사)숲연구소 이사장 -

"겨울 숲에서 나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안부를 묻는다."
겨울 숲이 고요하다. 산새들도 숲의 고요함을 즐기는 듯하다. 이 고요함 속, 오로지 내 몸속의 들숨과 날숨만이 자동차의 경적 소리만큼 크게 들린다. 숲 어딘가에 몸을 누이고 추위를 피하고 있을 멧돼지가 뿜어내는 거친 숨소리, 땅속에서 웅크리고 봄을 기다려야 하는 지렁이와 굼벵이, 내가 내뿜는 숨소리는 겨울 숲에서는 가장 소란스러운 소리들이다. 도시의 기계적 삶에서, 호흡을 하며 자유롭게 달리고,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생명체란 사실을 종종 잊게 된다. 고요한 숲은 그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뿐만 아니다. 숨소리를 가다듬고, 정숙한 공간과 고요한 숲의 세상으로 한발 더 깊이 들어서면 비로소 그동안 추상적으로만 표현되어지던 ‘아름다움’이란 실체를 만나게 된다. 도시적 삶에 깊숙해지면 질수록 나는 의도적으로 숲을 찾는다. 문명의 찌든 기계적 삶을 숲은 느끼는 삶으로 환원시켜주기 때문이다.
숲에서 나무가 속삭이는 소리와 한 점 오염되지 않은 바람소리를 들어보라. 온갖 생물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숲의 교향곡처럼 울려퍼지는 것을 들어보라. 숲은 언제나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제공해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우리의 몫이다. 나무와 숲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나무와 숲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성을 상실하고 자연성을 상실한 이 시대 현대인에게 간곡히 나무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다.
살아 있다는 것, 나무나 나란 존재. 무엇이 다를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동물과 일생에 단 한 번만 이동을 하고 더 이상 이동없이 살아가는 식물인 나무. 분자 단위의 화학 원소들만 있으면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양분을 얻을 수 있는 나무의 삶과 살아 있는 고분자 물질을 섭취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동물. 식물은 스스로 자가영양으로 살아가는 광합성 생물이라 하고, 동물은 식물이든 동물이든 간에 반드시 타자의 몸을 섭취를 해야 하는 타가영양으로 살아가는 호흡성 생물이다. 나무와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필요한 양분을 섭취해서 자신을 지탱한다.
사람은 척추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지만, 나무는 셀룰로오스로 자신의 육중한 몸을 탄탄하게 균형 잡는다. 사람은 태반이란 특수한 기관에서 자식이란 꽃을 피우지만, 나무는 나뭇가지의 모든 부분에서 자식을 잉태할 수 있는 열매라는 이름으로 꽃을 피운다. 사람이나 나무나 다른 모든 생물은 어느 하나 꽃을 피우지 않는 생물은 없다.
생물학적으로 꽃이란 생식기관이다. 즉 자신의 자손을 잉태하는 기관이다. 다람쥐는 새끼란 이름으로, 나무는 열매라는 이름으로, 새는 알이란 이름으로, 사람은 아기란 이름으로 자신을 닮은 후손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꽃이 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단지 생물종마다 각자 독특한 방식의 꽃을 피워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모두가 꽃을 피우는 존재자들만이 있는 곳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자손을 생산하기 위해 꽃을 피우는 나무와 다른 생물들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꽃을 피워주는 관계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비가 꽃을 찾아온 것은 꽃에서 얻은 꿀로 나비는 자신의 꽃을 피워 알을 낳고, 식물인 꽃은 나비 덕택에 수분이 이뤄져 자신의 꽃인 씨앗을 맺는다. 이처럼 자연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물들은 약육강식의 관계나 일방적인 약탈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생물은 서로가 서로의 꽃을 피워주는 그물망으로 살아간다. 사람이란 종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이 아닌, 모두가 함께 사용해야 하는 공동 생활공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다. 이 땅의 주인으로, 이 땅을 경영하고 개발해야 한다는 권리를 인간은 그 누구로부터 위임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인간이 마치 이 땅의 모든 것에 대한 이용권과 소유권을 허가받은 것처럼 주인 행세를 하는 격이다. 그 결과, 참혹한 두 가지의 큰 상실을 초래했다. 하나는 넘치는 물질만능사회가 가져다준 인간성 상실이요, 또 다른 하나는 자연성 상실이다. 각종 사회적 범죄행위와 자살률이나 패륜적 행위는 그 어느 시대보다 강하게 나타난다. 그 원인을 사회학자들은 물질소비를 위한 경제력이 인성을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간은 세상의 많은 생물들을 이분화해왔다. 잡초와 익초, 해충과 익충, 길조와 흉조, 잡목과 익목, 마침내 익인과 잡인 등으로 이분화한다.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삶의 관점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게 현실적 삶으로 나타난다. 문제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우리의 삶을 만족하게 하고 행복하다고 느끼며 살 수 있게 하느냐는 것이며, 행복하다면, 이러한 삶의 방식이 언제까지 지속 가능하느냐는 것이다.

제비나비와 가시엉겅퀴 "서로가 서로의 꽃을 피워주는 관계로 살아간다."
자연이란 숲을 만나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현재적 삶을 돌아보면서, 인간성과 자연성에 대해 깊이 성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다. 숲은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을 볼 수 있게 하는 거울과 같은 곳이다. 숲에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와 인류가 태어나기 100배나 먼 먼 세월부터 살아온 놀라운 삶이 저장되어 있는 지혜의 은행이기도 하다. 삶이 긴장되면 될수록, 스트레스가 가중되면 될수록 숲을 더 자주 찾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 숲은 마음이 열려 있는 그 어떤 생명체의 고충을 해소시켜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문호나 뛰어난 예술가들이 창작한 그들의 작품이나 사상들의 대부분은 숲이 준 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흐와 고갱의 작품 대부분은 자연이 아닌가. 시계처럼 정확한 발걸음으로 유명한 칸트는 한결같이 오솔길을 따라 숲을 돌아 자신의 사상을 정리해냈으며, 괴테 또한 프랑크푸르트 근교의 숲을 거닐며 자신의 사상을 세웠고, 석가나 공자 그리고 장자 등 일일이 다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위인들이 숲을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삶은 자연이란 숲에서 너무 멀리 와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가 어떤 일에 종사하든지 간에 숲을 찾는 일은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다. 자연성의 본질과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사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신나고 삶을 역동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숲길에서 만나는 작은 들풀과 키 큰 나무와 수많은 숲의 생물들이 뿜어내는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들의 삶에 함께 동참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인생이란 여행길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숲이 들려주는 그들의 놀라운 삶의 모습을 혼자 알고 있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이 지면을 통해 함께 공유하고 싶다. 그래서 혹여나 언젠가 숲이 연출하는 교향곡을 함께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기꺼이 그들을 대변하는 통역인으로 나서고 싶다는 욕망도 앞선다.
사람은 파동으로 만들어진 언어로 의사소통하지만, 나무는 빛깔과 향기가 그들의 언어이다. 사람의 언어가 자음과 모음으로 되어 있다면, 나무의 언어에도 자음과 모음이 있다. 그것은 빛깔이 모음이요, 향기가 자음이다. 빛깔과 향기를 다양하게 조합해서 섬세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며 살아가는 것이 나무이다.
나무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지만, 나무나 사람을 이루는 구성 성분이 탄소와 산소와 수소 등으로 이루어진 99.9%가 동일한 화학성분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해도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나무도 느끼는 존재다. 나무의 푸른 잎이 가을이면 단풍이 드는 까닭은 낮의 길이가 점점 짧아지고 있음을 감지하고 겨울을 준비하기 위한 나무의 능동적인 자기표현이다. 나무는 지구의 공전을 이해하고, 시계보다 더 정확한 생명활동을 보인다. 지구가 태양을 돌면서 나타나는 춘분과 추분, 동지와 하지를 인지하며 꽃이 피고 잎이 돋고 열매를 맺고 잎을 떨군다. 그것도 3개월 앞서 감지한다. 1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동지를 넘어서면 앙상한 가지엔 벌써부터 춘분이 오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잎과 꽃을 피울 준비를 한다. 한여름 무더위를 견디기 위해 땀 흘려 체온을 낮추고, 혹한을 견디기 위해 탄탄한 방한복을 스스로 만들어 입는다. 애벌레가 자신의 잎을 갉아먹으면 나무는 통증을 느끼며 자신을 방어할 물질을 뿜어낸다. 자신의 자식 격인 열매를 멀리 보내기 위해 누가 어떤 맛과 빛깔을 좋아하는지를 알고, 맞춤형 고객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래서 나는 나무가 사람보다 더 정교하게 더 민감하게 세상을 느끼며 살아가는 생물이란 생각을 굽히지 못한다.

"나무들 서로의 협력과 배려가 없으면 건강한 숲을 상상할 수 없다."
무엇보다 나무와 숲을 통해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도 포함된다. 둘째, 불완전한 존재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협력뿐이다. 협력은 착취와 경쟁이 아닌,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셋째, 생명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져 있는 자연에는 어느 것 하나 더 중요한 종이 있거나 존재 가치가 없는 종은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명의 한 종으로서의 인간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숲은 분명하게 전해준다. 자연이란 생명의 그물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자들에게 겸손과 존중을 학습하라는 것이 대자연인 숲의 명령이다.
30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숲이 좋아 숲을 공부해왔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매우 기계적이고 살아 있는 숲을 이해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숲은 과학적인 지식이 나열된 곳이 아니라, 심장이 뛰고 다양한 느낌으로 표현되어진 곳이다. 느낌의 숲, 스스로 보고 느낀 살아 있는 역동적인 숲 이야기를 전개할 것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숲은 느낌으로 먼저 만나야 한다는 사실에 방점을 두고 싶다. ◇ 출처 : 월간『불교문화』2015년 1월호
* 글쓴이 남효창 :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산림생태학을 전공했다. 동 대학교 산림환경정책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석사(1994)와 박사(1998)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임업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을 지냈고, 현재는 숲연구소를 설립해 이 땅에 숲과 인간이 더불어 사는 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환경부 환경교육자문위원, 세계생명문화포럼 추진위원, 생태 체험 교육 전문지『애벌레』발행인, 한국휴양학회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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