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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정겨운 모습들 - 흑백 TV

어르신1 2015. 2. 7. 06:47

 

 

사라져 가는 정겨운 모습들-흑백 TV

‘지지직…’.‘동시상영’ 간판이 붙은 3류극장의 스크린처럼 흑백TV 화면이 비오듯 떨리지만 안상독(安相督·62·대전시 동구 판암동)씨는 “오래 쓰다보니 이제 한식구가 됐다”며 자식 보듬듯 애정어린 손길로 TV를 어루만진다. 아들이 이웃집 안방문 틈으로 훔쳐보던 게 화가 나 돈까지 꿔 장만했다는 안씨네 TV는 14인치. 25년이나 된 고물이다. 손잡이는 반토막이 나있고 빨간 TV에 V자형으로 붙은 안테나 2개를 구리철사로 묶어 늘어뜨렸다. ‘평면’이니 ‘HD(고화질)’니 하는 최첨단 컬러TV가 판을 치는 세상에 고물 흑백TV를 우직스레 고집하는 그는 안테나만도 10번 이상 고쳤다. 시골에 처음 흑백TV가 들어온 것은 60년대 말에서 70년대초. 값이 비싸 대개 한 동네 통틀어 제일 잘사는 부자집 한집에만 TV가 있기 마련이었다.라디오보다 몇백배나 신기하고 재미있어 저녁마다 그 부자집 마당은 TV를 보러온 마을사람들로 꽉 차곤 했다. TV를 가진 부자집의 ‘TV 유세’는대단했으며 이들은 흑백TV를 보물단지 모시듯 했다. 낮에는자물쇠를 채워놓은 집이 흔했다. 난시청 지역이 많아 마을 뒷산마다 TV 안테나가 세워졌는데 화면 고장을 남달리 잘 고쳐 인기가 높은 TV ‘수리사’가 동네마다 한두 명씩은 있곤 했다. 마을에 있는 가게가 TV를 장만할 때쯤 되어서는 이 가게들은 문에 커튼을 치고 돈을 받고 TV를 보여주곤 했다. 시청료는 10원. 이는 당시 탁구공만한 눈깔사탕을 살 수있는 돈으로 꼬마들에게 적지않은 부담이었다. 돈이 없어 못 들어간 아이들은 창문살에 기대 커튼 사이로 TV를 훔쳐보려고 애를 썼다. 그때 유년시절을 보낸 이들은 지금도 모이면 “인심 한번 고약했다”며 쓴웃음을 짓는다. 사람들은 TV 앞에 모여앉아 ‘여로’에 울고 웃으며 다른오락시설이 없어 시골생활의 무료함을 달랬고 아이들은 ‘타잔’에 신바람이 났다. 타잔의 인기는 지금의 ‘디지몬’못지 않았다. 잎이 달린 칡덩굴을 잘라 타잔의 표범무늬 팬티처럼 허리에 두르고 나뭇가지에 줄을 매어 탔다. 물론 타잔의 ‘워어워∼’하는 괴성을 지르며. 줄이 끊어져 산비탈에 나뒹굴어도 타잔이기에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검객이 나오는 드라마가 인기를 모으면 아이들은 편을 나눠 칼싸움을 벌였다. 보다 단단한 칼을 만들기 위해 ‘뽀로스’(보리수)나무를 바닷물에 10일 이상 담가두기도 하는등 여간 공을 들이는게 아니었다. 흑백TV는 1970년 전국적으로 38만대에서 79년 596만여대로 크게 늘었다. 컬러로 바뀐 현재 TV는 가정용만 1,500만여대에 달해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흔해졌다. 그러나 안씨는 “흑백TV가 컬러TV보다 어리어리하지 않아좋다”며 “아주 못쓸 때까지 보겠다”고 말한다. 발췌 :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