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정겨운 모습들-비닐우산

어렵던 시절 우리들은 ‘비닐우산’을 즐겨 쓰기도 했다.
당시 아이들의 대부분은 맨발에 검정고무신, 파란색 ‘비닐우산’이면
최상의 ‘패션’이 되었다. 따닥거리며 비닐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유난히 커서 재미도 있었고,
‘마다리’나 ‘비료포대’를 뒤집어 쓴 아이들을 보면
우쭐하게 만들었던 ‘비닐우산’. 그러나 이것도 세태(世態)의 변화와
더불어 어느새 슬그머니 우리주변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파란우산 빨간 우산 찢어진 우산…’
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이 동요(童謠)도 어느새 아이들의 노래
레퍼토리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비닐우산’이
그래도 우리들의 추억(追憶) 속에는 크게 자리 잡아
시(詩)의 한 구절로 되살아나기도 하고 행위예술(行爲藝術)의
소재로 선택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대나무로 만든 ‘비닐우산’이 첫 선을 보인 것은
지난 1960년대. ‘철제우산(鐵製雨傘)’이 1950년대 한국전쟁 무렵에
생산된 것에 비하면 오히려 태생(胎生)은 늦은 셈이다.
당시 ‘비닐우산’은 지금처럼 댓살이 10개짜리가 아니라 30개짜리로
‘제대로 된 우산’ 취급을 받았다. 때문에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이 ‘비닐우산’을 비오는 철이 지난 뒤에도 고이 간직해 뒀다가
이듬해에 다시 쓰곤 했었다.
겨울철에 비닐우산 ‘댓살’을 잘라내 ‘연’을 만들었다가
아까운 우산(雨傘)을 망쳤다고 어머니로부터 꾸중을 듣던 기억은
그 당시 ‘비닐우산’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게 하기도 한다.
당시의 ‘비닐우산’은 또 어느 부분도 버릴 것이 없었다.
부러진 ‘댓살’은 가지나 고추 모종의 ‘지주대’로 사용되었으며,
손잡이는 검객(劍客)을 흉내 내는 개구장이들의 장난감으로
안성맞춤이었고, 말 안 듣는 아이들의 회초리로 모습을 바꾸어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토록 인기가 있었던
‘비닐우산’도 1970년대 말 2단 접이식 ‘자동우산(自動雨傘)’이
본격 생산에 들어가면서 서서히 빛을 바래기 시작했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뒤집히거나 부러져 1회용 우산 노릇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대부분 수작업(手作業)으로 생산되어
수지타산(收支打算)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자가용 승용차(乘用車)가 늘어나면서 ‘비닐우산’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갔다.
결국 1990년대 중반부터는 중국산(中國産) ‘플라스틱 우산’이
마구 수입되는 바람에 ‘비닐우산’ 제조업체(製造業體)들이
대부분 도산(倒産)해버렸다. 그러나 ‘비닐우산’은 여전히
우리들의 마음 한구석에 추억(追憶)으로 아로새겨져 시(詩)로
승화되기도 하고,
때로는 현대미술(現代美術)의 소재로 재탄생되기도 한다.
‘비닐우산’이 사라져가던
지난 1995년 8월 서울 시립미술관(市立美術館)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 표현매체전’에는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
이란 작품이 선을 보여 주목을 받기도 했고,
그 후 과천미술관(果川美術館)에서 재연되기도 했었다.
‘임시변통의 비 가리개’라는 뜻으로 우리사회 중년층의
의식구조(意識構造)에 깊숙이 자리 잡았던 ‘비닐우산’은
이제 아련한 추억거리로 밀려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