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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大關嶺)의 유래, 이야기|

어르신1 2012. 3. 25. 18:35

 

대관령(大關嶺)의 유래,이야기
대관령(大關嶺) 해발 865m 강릉과 평창을 이어주는 고개로 영동과 영서의 관문이다.
김홍도의 대관령

고려시대에 “대현”이라 불렸던 대관령에는 수 많은 역사와 민초의 애환이 살아 있은 곳으로 고려 태조(왕건)가 신검을 제압할 때 하늘의 계시를 받아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산신각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려사)에는 대관령산신제와 다른 한편으로는 국사성황신(신라김유신장군을 모신 사당)제를 지낸 역사가 기록되어 있고 그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 져 강릉단오제의 근거가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大關嶺西四十五里 卽州之 鎭山自女.. (대관령은 서쪽 45리에 있으며 이주(강릉부)의 진산이다) 하였다. 강원도 평창군 횡계리와 강릉시 어흘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99曲을 이루는 험지이나 대관령 정상부 서쪽은 평탄한 고을을 이루며 서울로 가는 큰 길이 있다고 문헌에 적고 있다.
옛길 주막

주막의 옛모습 그린 그림

대관령은 예로부터 영동과 영서를 잇는 교통요충지로 중요시 하여 삼국사기는 대령책(大嶺柵), 고려사 등은 대현(大峴)으로 적고 있으며 서유록(西遊錄).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는 대령(大嶺)으로, 중보문헌비고와 임영지 등에서는 대관령이라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문인 고형산이 1511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다음 해에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사비를 들여 오솔길이었던 대관령길을 넓혔으나. 사후 125년이 지난 후 부관참시를 당했다. 사유는 병자호란 때 주문진으로 상륙한 오랑캐군이 대관령길을 이용 해 한양이 함략 당하자 분노한 인조에 의해 참시를 당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대관령길 통행이 많아지고 다방면 활용이 많아지자 재평가되기 시작하여 고형산은 복권되어 위열(威列)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곳의 설화도 많이 전해 져 오는데 대표적인 것은 구산. 굴면이. 원울이재. 제멩이. 반쟁이. 웃반젱이를 거쳐 대관령을 오르내릴 때 강릉에서 대관령방향은 험하여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는 뜻에서 “대굴령”이라 하였고 이것이 변음되어 대관령으로 되었으며 또한 영서지방에서 영동지방 으로 오는 “ 큰 관문이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대관령이라 한다고 구전되어 온다.
신봉승의 대관령 시비

또한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강릉단오제와 깊은 연관이 있는 길로 백두대간의 뿌리인 태백산맥 줄기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더불어 주변 계곡과 옛길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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